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코프 주가슈빌리 (문단 편집) === 사망 ===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육군 제14전사사단 포병연대 소속 대위였던 야코프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공군 장교였던 이복동생 [[바실리 스탈린|바실리]]가 아버지 빽을 써서 [[땡보직|모스크바에서 꿀을 빤 반면]] 전방 육군 부대에 있었던 야코프는 전쟁이 발발하자 실제 전장에 투입되었다. 개전 당시 해당 전선 사령관인 [[이반 코네프]]는 스탈린에게 야코프의 부대도 곧 최전선에 투입될 예정이니 야코프를 후방으로 전근시켜도 되겠느냐고 넌지시 건의했지만 스탈린은 "그따위 쓸데없는 아첨을 하려들지 말라"고 대꾸했고 야코프는 그대로 최전선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전쟁 초기에 스탈린의 화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당시 소련군부가 스탈린의 의도를 오해해서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스탈린 화법은 겉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 의도가 일치하지 않았다.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매우 중시했던 그는 앞에서는 항상 자신에게 아첨하지 말라고 말하며 아첨하는 부하들을 질책했지만, 뒤에서는 아첨하는 부하들을 키워주는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어 스탈린의 부하들이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와 아첨으로 점철된 전기를 만들어 발행하려 하자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아첨으로 가득찬 이런 전기는 발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부하들은 스탈린의 발언을 거스르며(?) 그의 전기를 무려 100만부나 찍어 전국에 뿌렸다. 그리고 스탈린의 말을 거역한 부하들은 숙청되기는 커녕 오히려 중용되었다. 스탈린의 아들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스탈린은 교사들에게 아들을 엄하게 다스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방탕한 스탈린의 아들을 조금이라도 엄하게 대했던 교사들은 전부 숙청당했고 거의 학교가 폐교될 정도로 쑥대밭이 되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 육군 수뇌부가 야코프를 후방으로 보내자고 건의했을 때, 스탈린이 겉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말했어도 알아서 장남을 후방으로 빼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당시 스탈린의 스타일을 잘 몰랐던 소련군부는 스탈린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야코프를 전선에 내보내 버린 것. 야코프가 전선에 투입된 것과 달리 공군에 있었던 바실리는 후방으로 보내져 꿀 빨면서 지냈는데, 이는 당시 육군 수뇌부, 공군 수뇌부가 스탈린의 화법을 다르게 이해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평시였다면 이후 육군 수뇌부가 숙청되는 것이 수순이었겠지만 당시는 스탈린으로서도 절박했던 위급한 전시 상황이었기에 숙청 없이 넘어갔다. 한편 전쟁 발발 후 야코프의 가족들은 스베틀라나와 함께 [[소치]]로 피난 갔다. ||[[파일:야콮.jpg|width=100%]]|| || 포로가 되어 [[독일 공군(나치 독일)|루프트바페]] [[장교]]들과 함께 사진찍힌 야코프. 독일군은 이 사진을 삐라로 만들어 [[모스크바]]에 살포했다. || 스탈린은 아들의 부대가 최전선에서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지를 지속적인 보고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된지 한달여만인 7월 야코프는 [[스몰렌스크 전투(1941)|스몰렌스크 전투]] 중에 비텝스크에서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다. 이 사실은 8월이 되어 확인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야코프가 독일에 자진 투항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이에 대한 진실은 불분명하다. 한편 야코프가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이 확인된 후 스탈린은 소치에 피난갔던 야코프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하였고, 스탈린은 유대인인 며느리가 독일에 야코프를 팔아넘긴 게 아닌가 의심하여 270호 명령에 따라 즉시 며느리를 포함한 장남 일가를 수용소에 투옥시켜 버렸다. 한편 야코프를 포로로 잡은 독일군은 야코프에게 스탈린의 약점을 캘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심문을 계속했다. 또 독일은 야코프와 아버지의 불화를 이용하여 그를 전향시키려고 시도하며 독일의 거대한 군수 공업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야코프는 독일이 스탈린의 장남인 자신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전쟁이 끝나든 끝나지 않든 간에 언젠가는 결국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은 야코프가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듣고 괴로워했다. 며칠 동안 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를 불러 같이 잤다. 소련의 모든 지도층은 감히 스탈린 앞에서 야코프의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야코프의 안부와 더불어 구출작전의 실행 여부를 묻자 스탈린은 이를 허락하면서도 아들이 살아오길 기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식사 자리에서 스탈린은 식사를 하다 말고 접시를 밀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 야코프는 모국을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거요. [[독소전쟁|전쟁]]은 정말 끔찍해! 얼마나 많은 우리 인민의 생명을 앗아갔소! 틀림없이 가족과 친척 가운데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없을 것이오." 스탈린의 말처럼 야코프는 아버지를 믿으며 [[나치 독일]]에게 전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탈린은 야코프의 바람과 달리 그를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독일 측이 흔히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로 지목되는 독일군 장군과 야코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따르면 스탈린은 교환 제안을 듣고선 "어떻게 원수와 중위를 교환할 수 있냐?"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1941년 시점에서 파울루스는 아직 포로로 잡히지 않았고 독일 측이 그러한 제안을 해왔다는 문서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1943년에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하는데, 야코프가 43년 4월에 죽었고 파울루스의 항복은 2월 직전이라 2개월 정도 시간이 있기는 하다. 일단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 스탈린이 독일 측에서 야코프와 누군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이는 [[히틀러]]의 조카 레오 라우발 또는 하인츠 히틀러로 추정된다([[아돌프 히틀러/가족관계]] 참고). 1943년 4월 야코프는 작센하우젠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특급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 수많은 썰이 난무하였다. 포로수용소에서 경계병이 쏜 총에 사망하였다는 썰, 끈질긴 탈옥 시도에 독일군이 포로 수용소를 둘러싸고 전기가 흐르는 담장을 설치하였으나 그 사실을 알고도 담에 뛰어들어 감전사했다는 썰 등이 존재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야코프가 포로수용소에서 화장실 사용 문제를 놓고 같이 수용된 영국 장교와 싸움을 벌였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고압 철조망에 돌진해 죽었다는 야사가 나온다(...).] 자세한 정황은 상당히 불분명하나, 훗날 기밀 해제된 러시아의 자료 등에 따르면 수용소의 명령을 듣지 않아 경계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아들인 야코프의 죽음을 알게 된 스탈린은 겉으로는 멍청한 놈이라고 말은 했어도 속으로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부하들에게 자식의 최후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몸이 떨리도록 놀라면서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